글/시

맑은 차 한 사발

酒樂人 2011. 12. 23. 10:07

맑은 차 한 사발

 

엷은 노을 남은 볕이 절집을 비추이니
반쯤은 붉은 빛에 반쯤은 누런 빛.
맑은 차 한 사발이 다만 내 분수거니
누린내 나는 세상 온 종일 바쁘구나.
澹靄殘陽照上方 半含紅色半含黃
淸茶一椀唯吾分 羶臭人間盡日忙


아암(兒菴) 혜장(惠藏, 1772-1811)의 「산거잡흥(山居雜興)」 20수 중 제 14수다. 3,4구만 썼다. 뉘엿한 햇살에 노을이 맑다. 빗긴 해가 산 꼭대기 방장으로 빗겨든다. 종일 돌아다녔으니 저도 좀 쉬자는 눈치다. 이때의 이 빛깔을 어찌 설명해야 좋을까. 붉은 빛이라 하기엔 누런 빛을 띠었고, 누렇다고 하자니 붉은 기운이 감돈다. 툭 터진 안계(眼界) 너머로 구름 노을이 탄다. 사람의 한 뉘도 저와 다를 게 없겠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떠오른 아침 해가 서산낙조로 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맑은 차 한 잔을 끓여내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싼다. 따뜻하다. 이만 하면 내 살림이 참 넉넉하지 싶다. 저 산 아래 중생들의 세상에는 서로 뺏고 빼앗는 아귀 다툼이 한창이다. 헐고 뜯는 싸움판에서 마음은 까맣게 내던져 놓고, 탐욕의 누린내가 진동을 한다. 찻잔을 들어 다향을 맡고, 한 모금 가만히 머금어 내린다. 다 고맙다. 사위(四圍)는 어느새 어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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