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 아래 더욱 빛나는 천자의 면류관
탑산사 기점 구룡봉~환희대~연대봉~불영봉 원점회귀 산행
장흥 천관산(天冠山·723.1m)은 반짝였다. 산 아래 다가서기까지 산은 온통 구름에 덮여 속살을 드러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궂은 날씨에도 산 안으로 파고든 산객의 정성이 갸륵하다 싶었는지 먹구름은 슬그머니 물러나고 코발트빛 하늘이 드러났다. 그러자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 봉우리들은 파란 하늘 아래 빛났고, 연대봉(煙臺峰)에서 환희대(歡喜臺·720m)로 이어지는 용마루는 은빛 억새로 일렁거렸다. 여기에 산 아래 들녘은 황금빛 물결로, 바다는 짙푸른 코발트빛으로 삼라만상을 빨아들일 듯 강렬하게 빛났다.
“한밤중에 비 내리고, 새벽에 구름이 두텁게 덮여 오늘 헛걸음하겠다 싶었는데 날씨가 이렇게 좋다니. 여러 분은 복 받은 거예요.”
산행 안내를 맡은 엄길섭(장흥군청 기획감사실)씨는 탑산사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서는 순간 아륙왕탑 기암이 파란 하늘에 걸려 있는 것처럼 날씨가 쾌청해지자 “어제도 하늘이 잔뜩 흐려 억새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해 엊저녁 산신령님에게 내일은 맑은 날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빌고 빌었다”며 즐거워한다.
- ▲ 천관산은 기암과 억새 풍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산아래 들녘과 적당한 높이로 솟아오르고 뻗어나가는 산봉과 산릉, 그 너머 수많은 섬들이 돛단배 떠다니는 듯한 몽환적 분위기의 다도해가 펼쳐져 풍광이 배가되는 것이다.
닭봉능선 갈림목(닭봉 0.5km, 구룡봉 1.2km)을 지나 구룡봉 산길로 들어선다. 활엽수 잎이 바짝 말라가거나 바위에 덮인 돌단풍이 울긋불긋하게 변해가는 등 삼라만상이 가을을 맞아 변신하고 있건만 동백나무들은 짙푸른 빛을 그대로 간직한 채 푸르름을 더욱 도도하게 뽐내는 듯하다.
옛날 구룡봉 아래 탑산사가 불탔을 때 스님들이 금부처 모셔놓고 수도했다는 반야굴(般若屈) 앞에 도착하자 엄길섭씨는 굴 안을 들여다본다. 커다란 바위굴 속 깊숙이 자리 잡은 금부처는 옛 것일 리 만무하지만 굴 밖의 산객들을 반겨주기라도 하는 듯 어둠 속에서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동백나무와 소나무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자라는 호젓한 숲을 거쳐 방풍림처럼 울창한 대나무 숲을 벗어나 탑산사 큰절 앞마당에 올라선다. 1년 전 찾았을 때만 해도 허름한 농막처럼 느껴지던 탑산사 큰절은 고대광실을 연상케 할 만큼 커다란 법당 두 동이 한창 공사 중이다. 그래도 한켠에 시원한 샘물과 찻주전자를 놓아두는 인심은 그대로다.
큰절의 인심이 더욱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은 조망 덕분이기도 하다. 산 안으로 기암괴봉과 단풍빛으로 물들어 가는 숲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하는가 하면 산 밖으로 금물결이 이는 듯한 들녘과 옅은 해무에 덮여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다도해 풍광이 조화를 이룬 수채화를 떠올리게 한다.
- ▲ 억새는 다도해 풍광이 배경이 되어 한결 아름답게 빛난다. 환희대 가는 능선길.
바위꽃 위에 오른 등산인도 한 명 한 명 가을꽃
연보랏빛 구절초 꽃 피운 돌계단길을 따라 산사를 벗어나기 무섭게 높다란 기암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커다란 바윗덩이 다섯 개가 포개어 이루어진 기암인 아육왕탑(阿育王塔)이다. 인도의 아육왕이 신병(神兵)을 시켜 하룻밤 사이에 세웠다는 얘기와 함께 1610년 두 명의 학승이 기암 아래 의상암에서 수도 중 고승의 부름에 절 밖으로 나서자 맨 위에 얹힌 바윗덩이가 떨어져 암자가 부서졌다는 옛 얘기가 전하는 아육왕탑은 전설 같은 얘기가 아니더라도 조물주가 아니면 쌓을 수 없으리라 생각될 만큼 절묘한 형상의 기암이다. 커다란 기단석 위에 올라앉은 십자형 바위 위로 기둥바위 세 개가 얹혀 있고 그 위에 반듯한 거석 2개가 층을 이루며 올려져 있는 형상은 조물주가 만든 걸작 중 걸작이다 싶다.
아육왕탑 위쪽 너럭바위에 올라서자 바다는 한층 더 넓어지고 구름은 한결 높이 올라간다.
“너는 진짜 이쁜께 할미꽃이여. 나는 아직도 피지 못하고 있는디….”
“순자야! 너도 물들었나봐. 옷도 울긋불긋해지고 얼굴빛도 빨개진 게.”
구룡봉에 올라서자 40대 여성 등산인들로 시끌벅적하다. 구수하고 정감 넘치는 전라도 사투리로 서로 꽃이란다. 그럴 만했다. 용 아홉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놀았다는 구정봉 정상은 거대한 바위꽃이고, 그 위에 올라선 등산인들은 옷차림이나 환한 미소로 보나 가을 햇살에 활짝 피어난 한송이 꽃이었다.
구룡봉 정상은 조망대이기도 하다. 이스터섬의 거석들이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사람 얼굴을 빼닮은 기암이 여럿 모인 진죽봉(鎭竹峰)에서 연대봉을 거쳐 불영봉(佛影峰)으로 이어지는 천관산 산릉, 크고 작은 섬들이 돛단배처럼 두둥실 떠다니는 장흥·완도 앞바다, 그리고 두륜산~덕룡산, 월출산, 수인산, 제암산에 이어 멀리 무등산에 이르기까지 남도의 명산명봉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여기에 환희대에서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바람결에 은물결 치니 모든 게 감동이 아닐 수 없다.
- ▲ 구룡봉에서 환희대로 향하는 취재팀.
절정의 가을 맞아 환희의 소리내는 억새와 풀벌레
누렇게 변해가는 잡목 숲을 가르고 반짝이는 억새밭 사잇길 따라 휴양림 갈림목(휴양림 1.9km, 연대봉 1km)을 지나 환희대 삼거리에 닿자 억새 찾아 올라온 등산인들로 어수선하다. 여기에 “아이스케끼!”를 외쳐대는 상인의 목소리까지 가세하지만 모든 게 정겹기만 하다. 파란 가을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반짝이는 억새꽃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었다. 미물도 흥겹기는 마찬가진가 보다. 억새 능선길 따라 걷는 사이 호랑나비들이 하늘하늘 날더니 한 마리는 모자에 또 한 마리는 어깻죽지에 앉아 억새 탐승에 편승한다.
널찍한 닭봉 갈림목(닭봉 0.5km)을 지나면서 억새는 한층 화려해지면서 아예 은물결친다. 억새는 바람에 사각거리며 울음소리를 내고 억새 숲속의 풀벌레들은 억새소리에 덩달아 울어댔다. 슬픔의 울음소리가 아닌, 절정의 가을을 맞아 기쁨에 넘쳐 나오는 환희의 소리였다. 그 가을 소리에 젖어 산릉을 걷노라니 발걸음이 솜털처럼 가벼워진다.
억새밭 뒤편 멀리 망대처럼 우뚝 솟아오른 천관산 정상 연대봉은 깃발을 휘날리며 산객들을 맞아준다. 억새 풍광에 취한 몸과 마음으로 망대에 올라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력도 앞바다가 펼쳐진다. 크고 작은 섬들은 큰 고래가 물 위에 떠오르면 날치들이 물 위에 튀어 올라오는 듯 느껴졌다.
뒤로 돌아서자 억새 풍광에 취해 깜빡했던 천관산의 전형이 펼쳐졌다. 좌로 월출산, 우로 제암산과 같은 명산이 든든한 벗처럼 솟아 있는 천관산은 천자의 면류관 형상이란 묘사 그대로였다. 구정봉에서 종봉을 거쳐 선인봉으로 이어지는 암봉 하나하나 기암이요 보석이었다. 여기에 천문학과 지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1727~1798)가 후학을 양성하며 지냈다는 장천재 일원의 짙은 소나무 숲은 이 모든 것을 품어줄 듯 포근하게 다가왔다.
“오전 11시 반쯤 제주도가 보였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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